인문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 - 박찬국

담배피는까마귀 2025. 3. 12. 14:19

 메멘토 모리!

 

 끊었던 카페인까지 공급하며 2일간 힘들게 읽었다. 원본도 아니라 해설서를! 심지어 내용의 10%도 이해하지 못한 듯 하여 독서록을 쓰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그러나 바로 이전에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읽고 나서도 독서록을 쓰지 못하였고, 아무래도 존재와 시간의 주 내용이 이전부터 고심해오던 주제여서인지 푸코씨 보다는 이해가 잘 된 듯하여(내 착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독서록을 쓰고자 하는 결정을 힘겹게 내렸다.

 

 일단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맞이했던 첫 번째 난관은 바로 단어였다. 내가 분명 한국어를 읽고는 있는데 도저히 본 적이 없는 단어가 무수히 튀어나와서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그리하여 먼저 단어의 뜻을 정리하고 읽고자 생각했으나, 이것저것 뒤적여보니 단어의 뜻을 명시하지 말고 글의 흐름에 맞게 읽으라 하여 악으로 깡으로 읽어 보았다. 사실 두 번째 난관은 없다. 어려움은 단어로 시작하여 단어로 끝났다.

 

 예컨대 '존재와 시간'을 보면 '세계-내-존재'라든지, '기투' 같은 단어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이 글에서 하이데거의 용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내가 그런 용어의 용법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단어를 쓴다고 해서 똑똑해지지는 않기 때문에, 최대한 내 스타일대로 바꿔서 써보도록 하겠다.(틀릴 수 있다... 책은 직접 읽자...)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철학의 문제는 '죽음'일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고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 (필자의 사견이지만 필자는 근시간, 즉 필자가 자연사하기 전에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와 생물학의 발전으로 인류가 죽음을 극복한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기에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전제가 없다면 실존주의(하이데거는 자신을 '존재론자'라 말해주기를 바라지만)에 공감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지기 때문에 만약 독자가 나와 같은 의견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조금 더 보편적 인류의 시각으로 죽음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왜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서양 철학)은 '보편'이나 '이성'등을 탐구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하이데거는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우연히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자이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개별적인 존재자라는 것이다. (필자가 불교 신자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후세계 같은 이야기 하지 말고 현세의 고통과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석가모니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을 실존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위 괄호에서도 말한 것 처럼 하이데거는 자신이 실존주의자라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이 실존을 강조한 것은 맞지만,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실전을 통해서 존재를 규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철학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존재론이라는 것. 하지만 그의 존재론은 이전까지의 존재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전까지의 존재론자들은 '존재자'를 문제 삼았지만, 자신은 '존재'를 문제로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또 '존재자'는 무엇이고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자란 존재하는 어떤 것을 말하고, 존재란 존재자의 존재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돌려막기라고 느껴져도 어쩔 수 없다. 필자의 한계다.) 예를 들자면 까마귀가 존재하는 것. 즉 '존재자'이면, 까마귀가 존재하는 방식(까악까악 울어대기나 반짝이는거 훔치기 등)을 바로 '존재'라고 한다.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자들은 '존재자'에 대하여만 이야기했다. 만물의 근원, 실체... 이런 것들. 그러나 '존재'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기존 서양 철학의 역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을 해명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아마 지구에서는)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또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한다. 신의 형상이 들어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의미가 인간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하이데거는 인간을 '거기-있음', '현존재'라고 부르기로 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의 다른 존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긴 의미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불교 관련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만 여기까지 하자) 하이데거 이전의 철학자들은 '나'를 주체로 두고 '세계'를 객체로 두었다.그러나 하이데거에게는 '세계'란 단지 객체가 아닌, 현존재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하게 된 일종의 의미체계인 것이다. 그리고 현존재는 그러한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비로소 현존재가 된다.

 

 현존재는 3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1.존재성 2.배려 3.피투성이다. '먼저 존재성'을 보자. 플라톤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를 '이성'에서 찾았지만,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현존재로 만드는 것은 현존재의 존재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망치같은 도구들이 어떤 것으로 지시되고 있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현존재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용도도 가지지 않는 궁극목적이다. 현존재는 다른 도구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데, 현존재는 그러한 의미들을 통하여 세계를 구성한다. 책의 예시를 빌리자면 황금만능주의자와 예수나 부처같은 이들이 보는 세계는 전적으로 다를 것이다. (어제 책을 읽고 오늘 쓰고 있는데 분명 어제는 이해가 되었지만 오늘은 이해가 다시 안된다, 어제 이해했다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일단 끝까지는 써보도록 하겠다.) 또 이제 '배려'를 보자. 현존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로서 다른 현존재에게 취하는 태도를 하이데거는 '배려'라고 부르고 있다. 이 경우 '배려'라는 표현은 현존재가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 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배려'는 련존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 일반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협력하고, 반목하고,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 들이 모두 배려의 가능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배려는 또 개입하는 배려와 해방하는 배려로 나뉘는데 일상적인 삶에서 다양한 양식들로 배려가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은 피투성인데, 우리 인간이 세상에 선택해서 태어난게 아니라 그냥 내던져진 존재라는 뜻이다.

 

 그 이후 1장에서는 '빈말', '퇴락', '불안', '애매함' 등등으로 길게 설명하는데, 아마 하이데거가 내 요약본을 본다면 뺨을 후리겠지만 하이데거는 이미 무덤 속에 있으므로 간략하게 이야기해보자. 현존재는 빈말-호기심-애매성이 조장하는 퇴락, 즉 세상 사람의 공공성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문제삼지 않고 세상 사람이 제시한 가치와 의미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그러니까 현존재는 피투성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불안을 겪어야 하며 자기 자신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줄이면 모든게 잘 되고 있다고 느끼면 망한거니까 두려움에 떨면서 세계를 바라 보라는 뜻이다.(틀린점이 매우매우 많은 듯 하지만 필자의 한계다...)

 

  그러면 이제 2장 '현존재와 시간성'이다. 이 파트는 1장보다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로 3권 정도 실존주의와 하이데거 관련 책을 따다닥 읽고 올해 말쯤 존재와 시간 주석 본에 도전할 터인데 그때는 필자가 더 발전해 있기를 희망한다. 

 

 하이데거 이전의 관점에서 시간을 살펴보자.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지금 이 순간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인간이 없더라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를 것이다. 시간은 객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과 변화로 시간을 설명하였고, 뉴턴은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객관적이었던 시간을 주관적인 것으로 끌고 왔으나. 주관이 객관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다시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시간을 현존재가 존재를 드러내는 지평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존재의 실존은 근본적으로 시간성이라는 뜻이다. 현존재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상호 의존적이고 동시적이다. 끔찍하게 어려우니 예를 들어보자. 현존재는 자신의 관점을 시간 속에서 전개한다. 현존재는 "미래에 나는 책을 읽겠다"라는 식으로 자신의 관점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투시한다. 이러한 관점은 과거의 경험과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관심은 과거의 기분과 미래의 가능성을 오고가는 존재자라는 것이다.

 

 현존재는 어느 순간 태어나고 언제가 죽는다.(죽지 않는다 징징거리고 싶긴 하다.) 그러므로 시간은 무한하지만(아마?) 시간성은 유한하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신을 기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죽음을 미리 앞서가서 볼 수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자각하는 자만이 일상성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르멘 스텐비크 '바니타스의 알레고리'(1964) ⓒ 런던국립미술관

 

 죽음에 대한 경험을 미리 하면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남이 죽는걸 보라는게 아니다. 결국 타자를 관찰하는 것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죽음을 앞두면 정말로 중요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는 것, 한번쯤 자신이 시한부 판정을 받아 1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본 적 있는가, 필자는 꽤나 자주했다. 그런 상상을 하다보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이 구분되기 마련이다. 죽음을 미리 봄으로부터 현존재의 가장 본래적인 본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야기한다. "메멘토 모리!"